과학연구의 배후인 종교와 이데올로기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비를 정당화한다. 그 대신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의제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의 발견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한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이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았다. 아주 훌륭한 고립 속에서 1만 년을 살아남았던 이들은 쿡이 도착한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거의 몰살당했다.
선교사들이 서구 세계의 방식으로 이들을 가르치려 했다. 태즈메이니아인들은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기독교를 배웠으며, 천을 바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다양한 ‘생산적 기술’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학습을 거부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우울해했으며, 아기를 갖지 않게 되고 삶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과학과 진보의 현대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 죽음을 선택했다. 아, 과학과 진보는 이들의 사후세계에까지 좇아갔다. 인류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태즈메이니아인들의 사체를 강탈했다.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배후인 현대 제국주의
과학혁명과 현대 제국주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 규모를 합친 것만으로도 세계 총생산의 3분의 2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유럽은 경제적 난쟁이였다.
어째서 군사 - 산업 - 과학 복합체는 인도가 아니라 유럽에서 꽃피었을까?
영국이 약진했을 때 어째서 프랑스, 독일, 미국은 재빨리 따라가고 중국은 뒤처졌을까?
산업화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사이의 격차가 명백한 정치경제적 요인이 되었을 때, 어째서 러시아, 이탈리아, 호주는 그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고 페르시아, 이집트, 오토만 제국은 실패했을까?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매우 높은 탑을 세우고 있는 두 건축가를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나무와 진흙 벽돌을, 다른 사람은 강철과 콘크리트를 재료로 쓴다. 처음에는 두 방법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두 탑이 모두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결정적 문턱을 지나면, 나무와 진흙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비해 강철과 콘크리트는 시야가 미치는 한 층층이 계속 올라간다. 유럽인은 기술적인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집트나 스페인 혹은 인도를 정복했지만,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 몽골인, 아즈텍인들이 탐욕스럽게 새 땅을 정복한 것은 권력과 부를 찾아서였지, 새 지식을 찾아서는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의 정복과 영토의 정복은 점점 더 긴밀하게 합쳐졌다. 18~19세기 유럽을 출발해 먼 나라로 향한 주요 군사탐험대는 거의 모두 과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과학지식의 발견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165명의 학자를 데려갔다. 이들은 많은 일을 해냈지만, 무엇보다도 이집트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학문을 구축했고, 종교, 언어, 식물 연구에 중요하게 기여했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